25일 발굴 조사 현장 공개…매장 시설과 봉분 위치 사실 확인

[시티저널=허송빈 기자] 문화재청 국립 문화재 연구원 국립 부여 문화재 연구소가 이달 25일 부여 왕릉원 3·4호분 발굴 조사 현장을 공개한다.

부여 왕릉원 3·4호분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이 각각 한 차례씩 조사 했다.

그러나 도굴갱을 타고 돌방 안으로 들어가 바닥에 놓인 유물을 수습하고, 돌방 내외부 사진과 실측 도면을 제시하는데 그쳐 고분 조사에서 기본적으로 파악해야 할 봉분과 돌방의 관계, 봉분 흙의 종류, 조사 당시 주변 지형 등 면밀한 기록이 없다.

또 1971년 부여 왕릉원 일대에 대대적인 정비 공사까지 진행한 탓에 본래 경관도 크게 훼손된 상태다.

국립 부여 문화재 연구소는 2020년 중앙 고분군 일대의 시굴 조사를 먼저 진행해 3·4호분의 매장 시설과 봉분의 위치가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후 2021년부터 올해까지 봉분 조사를 실시해 경관 복원을 위한 입지 특성과 고분의 구조, 축조 과정을 확인했고, 조영 시점을 짐작할 수 있는 유물 자료도 확보했다.

우선 일제 강점기 지형도와 발굴 조사 결과를 종합해 볼 때 중앙 고분군에는 서쪽과 동쪽에 두 개의 능선이 있다.

3·4호분은 서쪽 능선에 위치하며, 동쪽의 얕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나머지 고분들이 위치하는 형세다.

또 고분의 구조와 축조 과정의 경우 고분을 조성할 위치에 돌방의 출입구를 기준점으로 직경 20m 안팎의 봉분을 구획한다.

경계 지점에 고분의 외부를 보호하기 위해 높이 40㎝, 너비 25㎝ 안팎의 다듬은 돌인 호석을 세우고, 그 내부에 봉분을 쌓았다.

이때 호석을 따라 그 바깥으로 1.4m 가량 사이를 두고 깬돌을 열지어 놓았다.

돌방은 당시 생활면에서 4.5m 가량을 굴착해 평면 '凸'자 형의 구덩이를 조성했다.

능선 정상부 쪽이 돌방의 뒷벽이고, 경사면 아래쪽이 출입구여서 출입구 쪽으로 갈수록 얕아지는 구조다.

돌방은 잘 다듬은 판석을 이용해 만들었고, 봉분은 돌방 천장을 기준으로 3.5m 가량이 남아 있었다.

시신을 안치하고 출입구에는 판석을 막아두고, 널길은 흙으로 채운 뒤 고분 외곽의 호석을 연결했다.

3호분과 4호분은 기본 축조 과정은 동일하지만 세부적인 차이가 있다.

3호분은 돌방 중심을 기준으로 봉분을 동쪽과 서쪽을 번갈아 가며 쌓았지만, 4호분은 수평으로 쌓았다.

3호분에서는 돌방의 출입구에 대형 석재를 덧대고 바닥에 널찍한 석재 2매를 겹쳐 만든 단과, 널길의 배수로 등을 확인했지만, 4호분에서는 추가 시설을 따로 확인하지 못했다.

고분 조영 시점을 알 수 있는 유물도 확보했다.

4호분에서는 동에 금을 입혀 만든 불꽃 형태의 목관 장식 금구(裝飾金具)를 확인했고, 익산 쌍릉 출토품과 같다.

3호분에서는 호석열의 석재 사이에서 암키와 편, 널길 채움토에서 연화문수막새 조각을 확인했다.

이 기와들은 모두 인접한 능산리 사지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고분 조영 과정에서 유입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자세한 사항은 전화(041-830-5611)로 문의하면 안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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